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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일본 최장수 총리 기록 깬 아베

어제(20일) 일본에선 또 하나의 역사적 기록이 탄생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재임 2886일을 넘김으로써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최장수 총리가 된 것이다. 아베 총리는 과거 조슈(長州)로 불리던 야마구치 현 출신이다. 조슈는 사츠마(薩摩·현재 가고시마 현)와 함께 제국주의 침략을 주도했던 군국주의 일본의 뿌리다.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당시 조선 주둔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훗날 총리), 내무·외무대신을 지낸 뒤 다시 직급을 낮춰 당시 조선공사로 부임했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정한론(征韓論)의 기초를 닦고 설파하며 메이지 유신 주역들의 정신적 스승이 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이 모두 조슈 출신이다. 아베 총리의 아버지도 외무상을 지냈고 외조부 2명은 총리, 고조부는 구한말 조선 주재 일본군 사령관을 지냈다. 아베 총리가 군국주의 일본의 적손이라 불리는 이유다. 한국 언론으로 접하는 분위기와는 달리 아베 총리의 일본 내 지지율은 꾸준히 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정치 특성상 이는 한국의 대통령 지지율 70~80%대에 비견될 만큼 높은 수치라고 한다. 이유가 있다. 우선 경제다. 한국의 불매운동으로 큰 타격을 받았을 것 같지만 사실 지금도 일본은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일을 할 수 있는 완전고용 상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국제 관계도 한국 하고만 껄끄럽지 별로 흠잡을 것이 없다는 것이 외교가의 중론이다. 거기다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짓눌려 있던 일본인들이 아베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그 멍에를 벗어던졌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아베의 최장수 총리 기록 경신은 당연한 결과라는 말이다. 역사를 보면 재임 기간이 길면서 큰 업적까지 남긴 지도자들이 왕왕 있다.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미국을 세계 최강국으로 올려놓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재임 1933~1945)는 미국 대통령으로는 유일하게 4선에 성공하며 12년간 재임했다. 청나라 4대 황제로 천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다는 뜻의 천고일제(千告一帝)로까지 불린 강희제(재위 1661~1722)는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긴 61년이나 보위에 있었다. 60년 간 황위에 머물렀던 건륭제(재위 1735~1796) 또한 중국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강희제의 손자였던 건륭제는 존경하는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보위에 있을 수 없다 하여 60년 만에 퇴위했다.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 안정을 이루어 백성들의 의식주 걱정을 덜어주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시대 가치를 발굴하고 문화를 융성 발전시킴으로써 인류 역사에 기여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지금 일본은 내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해 21세기 새로운 국가의 면모를 드러내 보이겠다는 야심에 불타고 있다. 이에 더해 아베 총리는 '대 일본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필생의 과업으로 공언해 온 평화헌법 철폐 및 개헌을 통한 군사 재무장을 마무리하고자 매진 중이다. 그 결과에 따라 아베는 최장수 총리에서 더 나아가 가장 추앙받는 일본 총리로 남을 가능성도 크다. 하지만 아베 총리가 일본을 넘어 세계적 리더가 되려면 피해 가서는 안 될 과제가 하나 더 있다. 공존과 공영이라는 현대 세계의 보편적 가치 구현에도 깊은 이해와 실천을 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과거사 무시하고, 이웃 짓밟고, 오로지 자기 나라 이익만 추구하는 한 그 번영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지도자란 얼마나 오래 권좌에 머물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가치있는 일을 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이종호 편집국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9-11-20

[역사의 창] 한인 2세 3세들의 6·25

#.임진왜란과 6·25는 판박이다. 1592년 4월 14일, 왜(倭) 함선 1진 700여 척이 부산포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고서야 조선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6·25 때도 그랬다. 그날 새벽 삼팔선에 첫 총성이 울리고서야 상황의 위급성을 깨달았다. 경과도 비슷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였다. 불과 두 달 만에 한양 도성은 물론 평양까지 함락시켰다. 삼팔선을 뚫고 기습 남침한 북한군도 사흘 만에 서울을 장악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대부분을 점령했다. 외국 군대의 도움으로 전세를 반전시킨 것도 똑같다. 400년 전엔 명나라가 조선을 도왔다. 6·25 때는 미국이 그 역할을 했다. 휴전 협상 또한 신기할 정도로 닮았다. 지지부진한 협상 속에서도 전쟁은 계속됐고 백성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후유증은 더 컸다. 강토는 유린됐고 죽고 다친 사람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우리 역사에 이 두 전쟁만큼 참혹하고 끔찍한 국란(國亂)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피 흘리고 수모를 당했음에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 내부 분열은 오히려 심화됐고 이념 또한 갈려 싸웠다. 명(明)을 섬길 것인가 청(淸)에 붙을 것인가 명분 다툼에만 열중했고, 반북극우인가 친북용공인가 반목하며 철 지난 색깔론에 붙들려 있다. 그 결과가 병자호란 국치였고 지금의 좌파우파 갈등이다. 하지만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임진왜란은 외적의 침입이었음에 비해 6·25는 동족상잔이었다는 점이다. 6·25로 분단은 더욱 공고화됐고 남북은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확실한 적(敵)이 되었다. 지금처럼 민족이 구분되지 않았을 때 한반도 특히 백제와 왜의 경계는 모호했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그리고 이후 계속된 침략과 노략질로 일본은 상종 못 할 외적이 됐다. 만주 북방민족도 그랬다. 본시 민족 구분 없이 섞여 살았지만 잇딴 침략 전쟁을 감내하면서 그들 역시 적대적 타민족이 됐다. 민족의 강토 또한 점점 쪼그라들어 지금의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이젠 그마저 또 반이 되었고 6·25를 겪으며 남과 북은 물리적 경계뿐 아니라 의식의 경계마저 이질화 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남과 북은 과거 주변 어떤 이민족보다 더 먼 사이가 될 지도 모른다. #.북한은 여전히 남한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다. 하지만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가 줄어들면서 북한을 대하는 시각도 달라지고 있음을 부인키는 어렵다. 특히 해외 한인 2세, 3세들이 더 그렇다. 그들은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보다는 한국인이자 동시에 미국인이라는 다중의 정체성을 지닌 세대다. 그들은 분단을 모른다. 1세처럼 향우회, 동창회, 교회 등의 테두리 안에도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담을 넘었고 일체의 경계를 허물려 한다. 1세들이 보기엔 불안하고 마뜩찮다. 하지만 이것이 희망일 수도 있다. 지금 한국이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이념 대립에 휩싸여 있다고 해서 해외 한인들까지 편 갈라 반목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해외 한인은 지금 세계에 800만 명이나 된다. 그중 약 200만 명이 미국에 산다. 그들은 새로운 공동체다. 새로운 역할이 있다. 분단에 따른 민족 분열과 증오, 알력과 갈등을 메우는 일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의 간디로 불리는 사상가 함석헌 선생은 일찍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렇게 썼다. "6·25를 지나봤으면 무력으로 아니 될 줄을 알아야 할 것이요, 전쟁 즉시로 그만두어야 할 줄 알아야 할 것이요, 국경을 없애고 세계가 한 나라로 되어야 할 줄을 알아야 할 것이요, 우리의 생명이란 곧 우주적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6·25 69주년을 맞으며 선생이 주창한 비폭력, 반전, 평화의 정신을 다시 새겨 본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9-06-20

[역사의 창] 역사의 미아가 된 김원봉

#. 미국 역사에서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재임 1829~1837년)만큼 논쟁적인 인물도 없다. 논쟁적이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쪽에선 찬사와 존경을 받지만 다른 한쪽에선 비난과 질타도 쏟아진다는 말이다. '인디언 토벌 작전'에서의 대활약으로 명성을 떨친 청년 잭슨은 영미전쟁(1812~1815)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여세를 몰아 정치에 입문, 한 번 고배를 마셨지만 결국 대통령까지 되었다. 1~6대까지 대통령은 모두 동부 명문가 출신이었다. 잭슨은 그것을 뛰어넘은 최초의 비동부 서민 출신 대통령이었다. 부패와의 전쟁을 이끌며 연방정부 재정을 튼튼히 했고 외교 수완도 탁월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백인 남성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등 대중 민주주의의 새 길도 열었다. 트럼프를 비롯해 지금도 많은 백인들이 그를 추앙하는 이유다. 하지만 잭슨은 극렬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원주민 소탕전을 지휘하며 무자비한 집단학살 명령을 서슴지 않았다. 대통령이 된 후엔 '인디언 이주법'을 제정해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4만5000여명의 원주민을 아칸소와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 '눈물의 길'에서 4000명이 추위와 굶주림,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미국 역사에서 인종 간 편견과 갈등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이었다. 그럼에도 잭슨은 굳건하다. 전국 곳곳에 동상이 세워졌고 20달러 지폐 모델로도 매일 미국인들을 만나고 있다(오바마 대통령 때 20달러 지폐 모델을 흑인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으로 바꾸기로 결정했지만 트럼프 집권 이후 흐지부지 됐다). #. 식민지를 거치고 분단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한국 역사에는 잭슨보다 더한 논쟁적 인물이 수두룩하다. 어떤 빼어난 인물이어도 친일과 반공이라는 잣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온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친일은 나은 편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가난해도 친일파 후손은 떵떵거리며 산다는 말처럼, 친일 당사자나 그 후손들 중엔 여전히 활개치며 사람이 많다. 하지만 반공 앞에선 예외가 없다. 한 번 '빨갱이'로 낙인찍히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연설로 논란이 된 '김원봉'도 그렇다. 그는 영웅적인 항일독립투사였다. 하지만 해방 공간에서 북으로 감으로써 우리에겐 난감한 존재가 됐다. 김원봉이라는 이름은 남북한 모두에서 지워졌다. 남에서는 김일성 정권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북에서는 반사회주의 반동분자로 일찌감치 숙청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황장엽(1923~2010)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김일성 주체사상의 기획자로 평생을 살았지만 1997년 남으로 내려온 덕에 대한민국 1등급 훈장도 받고 국립묘지인 대전 현충원에까지 묻혔다. 분단의 모순이자 우리 역사의 딜레마다. 문 대통령이 역사적 미아가 된 김원봉을 소환한 뜻은 이해할 수 있다. 대통령으로서 식민과 분단이 만들어낸 우리 안의 이념적 분열을 봉합하기 위한 상징으로 그를 택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1200만 명이 영화를 보고 김원봉에 박수를 쳤다고 해서 반공의 틀을 걷어내도 좋다는 사람까지 1200만 명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문 대통령은 놓쳤다. 더구나 우리는 아직도 미국처럼 공(功)은 공으로, 과(過)는 과로 분리해서 생각할 만큼 너그럽지도, '쿨' 하지도 못하다. 여론의 벽에 부딪쳐 김원봉 서훈 논란은 결국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앞으로도 꽤 긴 시간 논쟁거리로 남을 것이다. 다만 한 시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민족주의자를 한 두 마디 얻어들은 정보로 쉽게 재단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9-06-13

[역사의 창] 우리 역사 속의 러시아

#.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을 가졌다. 전 영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광활한 시베리아를 개척한 덕분이다.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였던 러시아는 어떻게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거대 제국이 되었을까. 러시아의 동방 진출은 1582년부터 시작됐다. 예르막이란 사람이 이끄는 800여 명 코사크인들이 우랄산맥 부근 시비르(Sibir) 강을 건너면서부터였다. 시베리아라는 이름도 시비르강에서 비롯됐다. 러시아의 동진을 부추긴 것은 모피였다. 담비, 수달, 밍크 같은 동물 모피는 겨울철 유럽 귀족들에겐 필수품이었다. '부드러운 금'으로 불릴 정도로 가격도 비쌌다. 러시아 상인들은 모피를 구하기 위해 탐험대를 조직해 동으로 동으로 내달렸다. 가난한 농민, 범법자, 일확천금을 노리는 한탕주의자들이 뒤를 뒤따랐다.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도 따라왔다. 당시 중국은 명(明)을 멸망시킨 청(淸)이 한창 팽창하고 있을 때였다. 양국의 충돌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청은 조선에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왕은 병자호란 때 볼모로 끌려갔다 돌아온 17대 효종(재위 1649~1659)이었다. 효종 시대의 화두는 북벌(北伐) 이었다. 아버지 인조의 치욕과 자신의 인질 생활 수모를 갚겠다는 일념으로 군사를 키웠다. 청나라는 이미 조선이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국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북벌론은 효종 치세 내내 사그러들지 않았다. 국내 정치용이었다는 말이다. 효종은 청나라의 출병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청을 치기 위해 조련한 병사들을 오히려 청을 돕기 위해 보내야 했다. 1654년 150명, 1658년 260명 등 두 차례에 걸쳐 조선 병사들은 청나라 군대와 연합해 흑룡강(아무르강)에서 러시아 군대를 무찔렀다. '나선정벌'이라 명명된 우리 역사상 러시아와의 첫 대면이었다. 나선(羅禪)이란 러시아 사람(Russian)을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 200년 뒤인 19세기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열강이 됐다. 중국이 서구 제국들로부터 침탈당할 때 러시아는 연해주를 챙겼다. 1884년엔 조러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조선에도 진출했다.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일본의 조선 지배 야욕이 노골화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을미사변) 오히려 친일 세력을 더 키웠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8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아관파천) 1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후 러시아는 조선의 보호국을 자처하며 각지의 삼림 채벌권, 광산채굴권 등 이권을 침탈했다. 하지만 러일전쟁(1904~1905)으로 일본에 무릎을 꿇고 러시아는 조선에서 물러갔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는 소련(소비에트연방)이 되었다. 태평양전쟁에 뒤늦게 뛰어든 소련은 1945년 종전과 함께 북한에 진주했다. 6·25땐 북한 편에 섰다. 여기까지가 과거 역사 속 러시아다. #. 내일(4월 27일)은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1주년이다. 기념은 해야 하는데 잔칫상에 올릴 과일이 마땅치 않다. 북미협상 교착으로 딱히 맺힌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김정은 위원장이 꺼내 든 카드가 블라디보스토크 북러정상회담이다. 19세기 말 러시아는 청-일 각축을 틈타 조선에 발을 들이밀고 각종 이권을 챙겼다. 지금 한반도 정세 속에서도 러시아의 노림수는 그때와 비슷해 보인다. 러시아의 등장으로 비핵화 셈법은 더 복잡해졌다. 그동안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며 달려온 문재인 정부의 역할도 모호해졌다. 급기야 6자회담 얘기까지 다시 나온다. 한반도 평화의 길은 풀릴 듯 풀리지 않는 고차방정식이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9-04-25

[역사의 창] 임시정부 100년의 열매

#.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 어제(4월11일)로 꼭 100년이 되었다. 이날은 '대한민국' 국호 탄생 100년, 우리 헌정사의 시작을 알린 역사적 문건인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10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100년의 무게는 개인의 기억만으로 감당하기는 버겁다. 기억이란 지극히 선택적이어서 여기저기 단절되거나 왜곡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남은 기억도 때론 윤색되고 편집된다. 기억은 기록과 함께할 때라야 역사가 된다. 기억은 있되 기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이비 역사로 흐르기 쉽다. 기록은 있지만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아무리 빛나는 역사라도 정치나 이념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만다. 전에 몰랐던 새 기록이 발견되면 역사도 새로 써야 한다. 빠진 곳은 채워 넣고 틀린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한다. 올해부터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이 4월13일에서 4월11일로 바뀐 것도 그런 차원일 것이다. 4월13일을 처음 국가기념일로 정한 것은 1989년 노태우 정부 때부터였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펴낸 '한일관계사료집' 4월13일조의 "국내외 인민에게 정부 수립을 공포했다"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에서 임시정부 관련 기록들이 새로 발견되었고 이를 연구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 수립일은 4월11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다. 결국 정부가 학계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임정 100주년인 올해부터 기념일이 공식 변경된 것이다. 다른 의견도 여전히 있다. 3·1운동 이후 비슷한 시기에 국내외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7곳이나 된다. 그중 실질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춘 곳은 상해와 한성정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임시정부) 3곳이었다. 각 지역 지도자들은 진통 끝에 통합에 합의했고, 1919년 9월11일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가 정식 출범했다. 따라서 진정한 임시정부 수립일은 9월11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 관점이 다르면 해석도 달라진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역사란 있기 어렵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임시정부였지만 민족주의, 사회주의, 무장투쟁파 등 여러 분파가 얼키고설켜 갈등과 분열을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상해 임시정부는 일제 강점기 한국인의 이념적 정부 역할을 하며 독립운동을 이끌어 왔다는 점, 또 8·15 광복 때까지 단절되지 않고 존재한 유일한 조직으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꾸준히 표명해 왔다는 점 등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충분히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 학계의 결론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뿌리가 상해 임시정부에 직접 닿아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1919년 4월11일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공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1948년 7월 17일의 '제헌헌법'으로 계승되었고 지금까지 대한민국 헌법 불변의 1조가 되어 있다. 100년 전 헌장을 계속 읽어본다.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임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信敎)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신서(信書)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대한민국 원년 4월 일,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어서 빨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모든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세우겠다는 민족 선각자들의 꿈이 지금도 느껴진다. 그리고 그 열매가 바로 지금 대한민국이다. 아직 분단극복이라는 숙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은 기억하고 기념할 가치가 있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9-04-11

[역사의 창] 한국을 더 사랑했던 미국인

#. 호머 헐버트(1863~1949). 버몬트 출신으로 1886년 23세 때 조선에 갔다. 원래 선교사였지만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독립운동가로 두루 활약했다. 한글의 우수성을 처음으로 알아보고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다. '아리랑' 악보와 가사를 영문으로 채록해 전 세계에 알렸으며 대한YMCA를 창설했다. 고종의 고문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에도 앞장섰다. 1908년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후 미국에서도 강연과 신문 기고 등을 통해 열심히 조선 독립을 도왔다. 한국 이름은 흘법(訖法) 또는 할보(轄甫). #. 엘리자베스 셰핑(1880~1934). 한국 이름은 서서평(徐舒平)이다. 1912년 32세 때 간호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다. 이후 평생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으며 병든 자, 헐벗은 자들의 친구로 살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 신학교인 이일학교(한일장신대의 전신)를 세웠고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 등을 만들어 여성운동에 힘썼다. 소록도 한센병 환자 요양시설과 병원도 그로부터 시작됐다. 1934년 만성 풍토병과 과로 등으로 숨지자 수많은 걸인, 나환자들이 장례식을 뒤따르며 "어머니, 어머니"하며 오열했다. '조선의 마더 테레사'로 불린다. #. 앨리스 샤프(1871~1972). 감리교 선교사로 1900년 조선에 첫발을 디뎠다. 한국 이름은 사애리시(史愛理施)였지만 '사부인'으로 더 많이 불렸다. 1906년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가 풍토병으로 숨지자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2년 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다. 충청 지역 최초의 근대적 학교인 영명학교를 비롯해 20여개 학교를 세우며 여성 교육에 헌신했다. 자녀가 없었던 그는 어려운 가정의 여러 여학생들을 후원하며 지도자로 길러냈는데 류관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영명학교에서 2년간 류관순을 공부시켰고 아예 양녀로 삼아 이화학당에서 수학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샤프 선교사가 없었다면 '3·1운동의 상징' 류관순도 없었을 것이다. #. 이들은 모두 원래 조국 미국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미국인들이다. 이들 만이 아니다. 3·1 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했고 50년 가까이 교육사업에 매진했던 한남대학교 설립자 윌리엄 린튼(1891~1960) 박사도 있다. 해방 직후 통역장교로 한국에 왔다가 한국의 꽃과 나무에 매료돼 천리포에 한국 최초의 사립수목원을 세웠던 민병갈(본명 Carl F. Miller: 1921~2002) 원장 등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수십 배 국력 차이 나는 나라 출신이었지만 조금도 군림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낮은 자리로 내려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친구가 되었다. 한국인들에게 자주와 자립 정신을 심어주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일깨워 주었다. 모두가 '미국의 정신'이자 인류 보편의 가치였다. 요즘 한미동맹 균열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대미 정책을 두고 하는 말들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만 셈하려 드는 트럼프 대통령 탓도 크다. 동맹이란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려면 돈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오가야 한다. 위 사람들은 모두 마음으로 먼저 한국에 다가갔다. 한국의 독립과 자유민주주의는 그들이 뿌린 씨앗으로부터 거둔 열매의 일부임을 한국 사람이면 다 알고 있다. 이해타산으로 유지되는 동맹은 이해가 상충할 땐 언제든지 종이가 되고 만다. 신뢰와 양보, 사랑과 희생으로 맺어진 끈이라야 쉬 끊어지지 않는다. 3·1운동 100년을 맞는 지금 우리가, 또 미국이 한 세기 전 진정으로 한국을 사랑했던 '진짜 미국인들'에게 배워야 할 교훈이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9-02-28

[역사의 창] 링컨 시대의 또 다른 대통령

#.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두 대통령, 조지 워싱턴(1732~1799)과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은 모두 2월에 태어났다. 워싱턴은 22일, 링컨은 12일이다. 미국이 매년 2월 셋째 월요일을 연방공휴일로 지정한 것은 이들 위대한 두 대통령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실상 역대 모든 미국 대통령들을 기념하는 날이 됐다. 링컨은 1861년 3월, 제 16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상황은 몹시 나빴다. 연방 대 반연방, 남부와 북부의 대립, 흑백과 빈부의 격차 등으로 나라는 분열 직전이었다. 당장 링컨이 당선되자마자 보란 듯이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을 탈퇴했다. 이어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차례로 뒤를 따랐다. 이들은 1861년 2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남부연합(Southern Confederacy)이라는 이름으로 독자 정부를 수립했다. 새 대통령도 뽑았다. 공식 국호는 아메리카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CSA)이었으며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4년간 존속했던 '나라'다. #. CSA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은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였다. 그는 링컨과 같은 켄턴키주 출생이었으며 나이도 8개월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외모도 비슷해 키가 크고 얼굴은 길고 뾰족했으며 턱수염까지 링컨과 닮았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모든 면에서 링컨과 대비됐다. 링컨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이라고는 거의 못 받았던 자수성가형이었던 반면 데이비스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고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까지 졸업했다. 군인으로 멕시코 전쟁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으며 14대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 시절엔 장관도 역임했다. 30대에 이미 100명 이상의 노예를 거느린 농장주가 되었고 미시시피주 연방하원의원을 거쳐 연방상원의원까지 되었다. 하지만 미시시피주가 연방에서 탈퇴하자 상원의원직을 사퇴하고 미시시피로 돌아가 남부연합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그의 리더십은 많이 부족했다. "완고하고 고집이 셌다" "작은 일까지 간섭했다" "군 인사에도 친소관계를 중시했다"는 것들이 기록된 그의 평가들이다. 실제로 그는 민간 관료들은 물론 군부 장성들과도 불협화음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대통령으로서 가장 큰 결점은 시대의 큰 흐름을 읽지 못하고 '독립'을 염원한 전체 남부인의 꿈과 열정을 제대로 결집시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링컨의 리더십은 그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링컨은 어떤 상대도 100%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 심지어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남부에 대해서도 화합과 포용을 강조했다. 명령과 강제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중요시했고, 능력만 있으면 자신을 반대했던 사람까지 활용했다. 취임 초 내각을 구성할 때나 전쟁 수행 중에도 평소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뿐 아니라 상대 당 출신들까지 파격적으로 기용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분리될 뻔했던 미국을 다시 하나로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포용의 리더십이 결정적이었다. #. 오는 월요일은 한국엔 없는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이다. 전직 대통령 두명을 감옥에 둔 나라 출신 이민자로서 솔직히 이런 날이 있다는 게 많이 부럽다. 워싱턴, 링컨같은 국민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대통령을 가졌다는 게 부럽고, 허물 많은 대통령까지도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 기념하는 분위기가 또 부럽다. 한국은 언제쯤에나 '우리 모두의 대통령'을 가질 수 있을까. 또 제대로 기념할 수 있을까. -사족. CSA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남북전쟁 종전 직후 반역죄로 체포돼 수감되었지만 2년여 만에 사면됐다. 극우 인종주의자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면서 그의 동상이 철거되는 등 수난도 겪지만 여전히 남부에선 로버트 리, 스톤월 잭슨 장군 등과 함께 남부단결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9-02-14

[역사의 창] 멕시코 국경 장벽과 만리장성

#. 지난 연말 뉴멕시코 일대를 여행했다. 12월 22일부터 시작된 연방정부 셧다운 바람에 벼르고 별렀던 계획이 뒤죽박죽이 됐다. 텐트락스, 밴들리어, 화이트샌즈 등 여러 준국립공원(National Monument)과 박물관들이 문을 닫아 헛걸음하거나 아예 방문을 포기했다. 텍사스주 접경 칼스배드 동굴 국립공원과 텍사스주 최고봉 과달루페마운틴 국립공원도 입구만 훑고 왔다. 셧다운이란 예산 처리가 되지 않아서 연방정부 주요부서 업무가 일시 정지되는 상황을 말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공공 안전에 직결되는 업무는 계속 된다고는 했다. 하지만 연방공무원 38만 명은 무급휴가 상태로 전환되고 42만 명은 급여를 받지 않는 상태로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일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불편과 피해는 나같은 국민들 몫이 됐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는 이번 셧다운으로 미국 경제가 매주 12억 달러의 손실을 보고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 1970년대 이후 연방정부 셧다운은 이번이 21번째다. 평균 2년에 한 번 꼴이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번이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사상 최장의 사태이고, 공화 민주 양당이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점이다. 사태의 직접 발단은 멕시코 국경 장벽 설치 문제다. 장벽 건설을 비롯한 멕시코 국경 경비 강화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공약이었다. 이에 반해 민주당은 국민 세금으로 장벽 세우는 것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북쪽 캐나다 국경과 달리 남서부 멕시코 국경은 미국의 고민거리이긴 하다. 국경 인접 도시들은 히스패닉 인구가 80~90%에 이르는 곳이 수두룩하다. 그들은 미국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다. 스패니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강력한 흡인력으로 중남미 불법 이민자들까지 끌어 모은다. 이민자의 나라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백인 중심 문화를 근간으로 하는 미국 보수 세력이 충분히 위기감을 가질 만한 대목이다. 더구나 중부 사막 국경 너머엔 멕시코 정부조차 통제력을 잃어버린 마약상과 무장집단들이 활개를 친다. 미국 안보에도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남부 백인 보수층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경 장벽 설치에 집착하는 이유도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성과 벽은 이민족을 막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특히 중국은 2500여년 전부터 장벽을 쌓았다. 춘추전국시대 진(秦), 조(趙), 연(燕) 등이 북방 유목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시황제, 한(漢) 무제를 거쳐 17세기 명(明) 말기까지 장성 수축과 중수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쌓은 성이 만 리나 된다 해서 만리장성이 됐다. 하지만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쏟아 부어 쌓은 장성도 결정적 순간에는 무용지물이었다. 4세기 5호16국, 10세기 5대10국 등 혼란기 때마다 이민족에게 뚫렸고 13세기 송(宋) 때도 여진족 금(金)에게 뚫렸다. 이후 남송은 장성을 넘어온 몽골족에게 무릎을 꿇었고 사실상 지금의 만리장성인 17세기 명대(明代) 장성도 만주족으로부터 명나라를 끝까지 지켜주진 못했다. 인위적인 경계선은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무너지고 만다.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제패했던 청(淸)의 걸출한 황제 강희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진이 장성을 축조한 이래, 한-당-송 역시 항상 수리를 하였는데 그렇다고 변방으로부터의 환란이 없지 않았다. 오직 덕을 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만이 국토 수호의 방법이다. 백성의 마음이 기쁘면 나라의 근본을 얻게 될 것이니 변경도 저절로 굳건하게 될 것이다." 만리장성은 중국의 상징이 됐지만 원래 목적은 사라지고 오직 관광 유람지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그게 부러워서라면 모를까 다른 이유라면 트럼프 대통령은 멕시코 장벽 건설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이미 자유의 여신상 같은 훌륭한 상징물이 있고 가 볼만한 관광지도 널렸는데 무슨 또 다른 게 필요할까. 오직 중남미 불법 이민자를 막는 것이 목적이라면 방법은 장벽 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9-01-17

[역사의 창] 사자처럼, 바람처럼, 연꽃처럼

#. 1000만 명이 숨진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끝이 났다. 독일의 항복 서명은 파리에서 50마일 떨어진 콩피에뉴 숲에서 이뤄졌다. 당시 연합국 총사령관이었던 프랑스 장군 페르디낭 포슈 대원수의 전용 객차 안에서였다. 22년 뒤인 1940년 5월 나치독일은 다시 프랑스를 침공했다. 프랑스는 두 달을 못 버텼다. 히틀러는 1차 대전 때의 수모를 갚겠다며 같은 해 6월 22일 콩피에뉴 숲, 똑같은 장소에서 프랑스로부터 항복 서명을 받았다. 파리에 보관 중이던 1차 대전 당시의 객차까지 일부러 옮겨와서 였다. 프랑스군은 왜 그렇게 무참히 무너졌을까. 레지스탕스로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그 패인을 통렬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상한 패배-1940년의 증언'이란 책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프랑스군은 온갖 비효율성에 발목 잡혀 있었다. 복잡한 지휘체계와 군 간부의 경직화, 형식적인 보고 관행, 현장에 대한 무관심, 부서간 칸막이 현상과 책임 소재 미루기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결함은 군 지도부의 잘못된 전략과 역사에 대한 무지였다. 독일군은 1940년대에 걸맞은 현대전을 벌이고 있는데 프랑스군 지도부는 여전히 1915년의 전쟁 방식을 고집했다. 그들은 대부분 1차 대전 때의 지휘관들이었다. 또한 정도는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지난 전쟁 때의 승리에 취해 있었고 과거 경험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패배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경험에의 집착이 주는 위험성이다. 비슷한 사례는 기업에서도 흔히 있다. 한 때 세계 최대 휴대폰 제조회사였던 노키아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안드로이드와 iOS가 지배적인 상황이 되고 있음에도 계속 자사 고유의 운영체계만 고집하다 무너졌다. 1990년대까지 세계 최대의 음반회사로 군림했던 영국의 HMV사는 온라인 음반 판매,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 등의 변화를 외면하다 몰락했다. 모두 과거의 성공 방식만 고수하며 새로운 흐름을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무시한 탓이었다. #. 2019년이 시작됐다. 하지만 지구촌 소식은 희망보다는 어두운 전망들이 더 많다. 미주 한인사회도 그렇다. 구성원의 고령화와 이민자 유입 감소라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본질적 문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새로운 움직임은 드물고 타성으로 움직이는 게 일상이 됐다. 조직이나 단체는 여전히 10년 전, 20년 전 방식대로 움직이고 사람도 그 때 그 사람들이다.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문제는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라든지 '우리 때는 말이야…'라는 식의 과거 집착이다. 경험은 빛나는 자산이지만 때론 미래를 가로막는 족쇄가 된다. 시야를 좁히고 변화에 둔감하게도 만든다. 이는 결국 사회나 개인을 지체(遲滯) 상태로 몰아간다. 지체란 기술과 사회 현상은 앞서가는데 생각이나 행동 방식은 뒤따르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는 도태 아니면 소멸이다. 한인사회도 그런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 블로크의 조언은 아직도 유효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지적 유연성이다." 새로움을 향한 열린 마음과 과감한 시도가 길이라는 말일 테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새해 벽두 친구로 부터 받은 연하장 문구다. 나는 이를 '사자처럼 용기있게 /바람처럼 거리낌 없이 /연꽃처럼 맑고 향기롭게'로 바꿔 읽었다. 과거 경험에만 얽매이지 말고 늘 새로움을 향해 고고하게 나아가라는 일깨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이 문구가 올 한 해 한인사회 모두에게도 작은 울림이 되기를 기원드린다. 한인사회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9-01-03

[역사의 창]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 지난 1일 패서디나 인근 한 공동묘지에서 피득(彼得)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외국인을 기리는 기념동판이 제막됐다. 주인공은 19세기 말 조선을 찾았던 러시아 출신 유대인 선교사 알렉산더 피터스(1871~1958). 구약성경 시편 일부를 처음 한글로 번역했고 나중엔 구약성서 전체 번역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하지만 한국에선 거의 잊혀 있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번 동판 제막은 지난 해 풀러신학교에 연구교수로 와 있던 연세대 박준서 명예교수가 거의 버려져 있다시피 했던 그의 묘역을 어렵사리 찾아내고 한국 교회에 기념사업을 호소해 이뤄진 첫 결실이었다. #. 기독교가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은 다방면에서 크고 깊었다. 그 중 정말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잘 부각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한글 대중화에 끼친 역할이다. 알다시피 한글, 즉 훈민정음은 1443년 세종대왕이 창제했다. 세계 어느 문자와도 견줄 수 없는 창의적이고 실용적인 글이었지만 또한 그 이유 때문에 조선 내내 제대로 진가를 인정받지 못했다. 국가 공식 문서나 양반 사대부들의 소통 문자는 늘 한자였고, 한글은 언문(諺文)이라는 이름으로 속되게 불리며 상민이나 부녀자들이나 쓰는 글자로 전락해 있었다. 창제 450년이 지난 1894년 갑오개혁 때에야 비로소 한글은 나라 글이라는 뜻의 국문(國文) 호칭을 얻고 한자와 함께 조정의 공식문자로 인정받았다. 그럼에도 식자층에선 여전히 한문을 선호했다. 한글이 본격 빛을 보기 시작한 데는 19세기 기독교 선교사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은 양반 사대부가 아닌 백성들의 말과 글에 주목하며 한글부터 배웠다. 우리말 단어를 채록하고 한글 사전과 문법을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도 선교사들이었다. 초기 한글 성경은 선교사들의 그런 노력의 산물이었다. 최초의 한글 성경은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1842~1915) 등이 1882년 만주에서 발간한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다. 이후 로스 선교사 팀은 신약을 낱권으로 잇따라 번역했고 1887년엔 신약 전체를 완역한 '예수성교젼서'를 펴냈다. 구약 번역은 앞서 말한 피터스 선교사가 1898년 펴낸 '시편촬요'가 처음이었다. 촬요(撮要)란 요점만 뽑아 만든 소책자라는 뜻으로 '시편촬요'는 시편 150편 중 62편만 골라 엮은 책이다. 신·구약을 합친 최초의 한글 성경 완역본인 '성경젼서'는 1911년에 나왔다. 한국 교회는 지난 2011년 한글 성경 10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를 펼친 바 있다. '성경젼서'의 발행은 한국 기독교뿐 아니라 우리 문화사 측면에서도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성경젼서'엔 훈민정음 창제 이후 그때까지 간행된 어떤 한글 책보다 많은 내용과 어휘가 담겼다. 오랜 한문 숭상의 전통에 억눌려 미처 알지 못했던 한글의 가치를 일깨웠다는 점도 소득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큰 공적은 이를 통해 본격적인 한글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는 점이다. #. 경기도 용인에 가면 '선교사 로스 기념관'이 있다. 최초 신약성경 한글 번역자의 공적을 기리는 곳이다. 그에 비하면 구약성경의 최초 번역자이자 46년간이나 한국에 머물며 한글 성경 번역에 이바지한 피터스 선교사에 대해서는 한국 교회가 너무 무심했다는 것이 박준서 교수의 생각이다. 박 교수는 지난 달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받은 은혜를 잊지않고 감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한국 교회는 피터스 목사가 이룬 공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가 신채호 선생은 과거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도 없다고 했다. 성경 번역이라고는 해도 우리 민족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사람을 기억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한 원로교수의 노고에 힘입어 이제부터라도 피터스라는 사람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다행이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12-06

[역사의 창] 콜럼버스 동상 철거를 보며

# 지난 토요일(11월 10일) 오전 8시 30분. LA다운타운 힐스트릿과 그랜드애비뉴 사이 그랜드파크에 있던 콜럼버스 동상이 철거됐다. 1492년 유럽인으로는 처음 신대륙에 상륙했던 바로 그 콜럼버스다. 철거된 동상은 일단 창고로 옮겨졌으며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지는 LA수퍼바이저 보드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이에 앞서 LA시의회는 지난 해 연방공휴일인 '콜럼버스데이'를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Indigenous Peoples Day)'로 대체하기로 결정했었다. 공식 시행은 내년(2019년)부터다. LA만이 아니다. 콜럼버스데이 철폐 움직임은 미국 전체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현재 미국 50개 주 가운데 콜럼버스데이를 유급 휴일로 인정하는 주는 절반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는 이탈리아 제노바 출신의 탐험가다. 스페인 여왕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을 횡단 1492년 10월 12일 지금의 바하마 제도에 처음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도착한 땅이 인도의 일부라고 믿었다. 그래도 콜럼버스가 개척한 뱃길 덕에 아메리카 대륙은 곧 바로 유럽인들의 새로운 활동무대가 되었다. 미국은 건국 직후부터 콜럼버스 신화를 만들어갔다. 컬럼비아라는 말은 신대륙 미국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1791년 새 수도 이름을 초대 대통령 워싱턴과 콜럼버스를 기리기 위해 '워싱턴 DC(District of Columbia 컬럼비아 특별구)'라고 지었다. 1792년 콜럼버스 신대륙 도착 300주년을 맞아 뉴욕에선 처음으로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다. 1754년 세워진 뉴욕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킹스칼리지도 1784년 컬럼비아로 이름을 바꿨다. 그밖에 거리 건물 공원 등 전국 곳곳에 콜럼버스와 연관된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1937년 콜럼버스데이(10월 둘째 월요일)는 마침내 연방공휴일로까지 지정됐다. 콜럼버스는 미국인의 영웅이 됐다. 그의 모험심 도전정신 개척정신은 미국의 정신으로 포장됐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배웠고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해석에 조금씩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양해지고 소수계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유럽 백인의 시각이 아닌 원주민의 입장에서 바라본 콜럼버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안중근 의사가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일본에선 근대화의 영웅이지만 우리에겐 침략의 원흉인 것과 같다. 그들은 말한다. "콜럼버스가 미국의 먼 뿌리인 것은 맞다. 하지만 잔혹한 원주민 학살 문화 파괴 전염병 전파 노예제도 옹호 등 숱한 부작용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 또한 콜럼버스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버젓이 동상을 세우고 해마다 기념한단 말인가." #. 역사는 이긴 자 힘 쎈 자의 전유물이다. 과거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평가나 해석도 시대 분위기나 권력의 향배에 따라 곧잘 바뀐다. 미국에서 콜럼버스가 그렇듯 한국에도 그런 '문제적 인물'들이 많다. 이승만 박정희 그리고 맥아더. 모두 한국 현대사의 장면장면 주인공들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해석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그들의 동상이 10년 후 100년 후 어떤 자리에 어떻게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흘러간다. 15세기 콜럼버스가 역사라면 21세기 LA 도심의 콜럼버스 동상 또한 역사다. 콜럼버스를 위인으로 기리는 것 이상으로 이 땅에 살아온 원주민들이 겪은 고통과 괴로움은 물론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다 덜어내 버리면 남아날 역사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역사의 흔적을 섣불리 파괴하는 것은 또 다른 야만이다. 철거된 콜럼버스 동상이 어디에선가라도 다시 자리잡아 이 시대를 증거하는 흔적으로라도 남았으면 좋겠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11-15

[역사의 창] 가야 왕비가 된 인도 여인?

#.'가야'는 잊혀진 왕국이다. 600년이나 존속했지만 남은 기록이 별로 없어 신화나 설화로 해석해야 하는 '신비의 왕국'이 됐다. '삼국시대'라는 용어 탓도 컸다. 이는 우리의 고대사 인식의 틀을 고구려-백재-신라 세 나라의 쟁패 안에 가두어 버렸다. 그로 인해 우리 고대사는 훨씬 빈약해졌다. 고조선을 계승해 만주에서 600여 년을 이어간 부여도 잊혀졌다. 동예, 옥저, 탐라, 발해도 우리 역사 안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했다. 그 틈을 비집고 일본은 식민사관으로,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우리 고대사를 탈취하려 획책하고 있다.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낙동강 유역에 흩어져 있던 여러 작은 나라들의 연맹체였다. 가야 외에도 가락, 가라, 구야 등 한자 표기가 다양하다. 원래 고을, 마을을 뜻하는 고대 우리말을 한자로 적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한다. 가야는 번성했다. 철기문화를 꽃피웠고 왜와 교역하며 함께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통일 왕국을 이루지는 못했다. 신라는 법흥왕 때인 서기 532년 김해 중심의 가락국(금관가야)을, 그리고 30년 뒤 진흥왕 때인 562년 고령 일대의 대가야를 마지막으로 복속시켰다. 정벌의 주역은 이사부 장군. '독도는 우리땅' 노래에 나오는, 우산국(울릉도)을 정벌한 바로 그 사람이다. 가야는 망했어도 인물과 문화는 신라로 이어졌다.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설총·최치원과 함께 신라 3대 문장가로 꼽히는 강수, 가야금의 대가 우륵 등이 모두 가야의 후예였다. #. 삼국유사는 가락국 첫 임금 김수로왕과 왕비 허황옥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허왕후는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바다를 건너와 수로왕과 혼인하고 10남 2녀 자녀를 나았다. 그 중 8명은 수로왕의 성을 따서 김해 김씨가 되었고, 2명은 허왕후의 간청에 따라 김해 허씨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아유타국이 인도 북부의 작은 도시 '아요디야'였다는 주장이 나온 이후 한국과 인도 관계를 이어주는 단골 인용 메뉴가 되었다. 하지만 이를 사실로 믿는 학자는 거의 없다. 인도 고대사를 전공한 부산외국어대 이광수 교수도 '인도에서 온 허왕후, 그 만들어진 신화'(푸른역사 펴냄)라는 책에서 "5세기 이전에 아요디야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는 실제 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허왕후 이야기는 1000년에 걸쳐서 김해 김씨, 불교 사찰, 양천 허씨, 일부 민족주의자 등에 의해 이야기가 덧대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허왕후 이야기가 실린 삼국유사도 가야 멸망 후 700년 넘게 지나 씌어졌다. #. 대통령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11월 4~7일 인도를 방문한다. 인도 북부 아요디야 시에 조성되는 허왕후 기념공원 기공식 참석이 주요 목적이다. 영부인이 대통령을 두고 혼자 외국 방문에 나서는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외교 파트너로서 인도가 한국에 중요해졌다는 이야기이겠다. 그럼에도 우려되는 부분은 있다. 양국 교류 친선 확대에 우리 옛 이야기가 활용되는 것은 좋지만 이런 식으로 설화가 실제 역사로 굳어져가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인도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도 "가야 왕비 허황옥을 인도에 실재했던 사람"으로 언급했었다. 우리나 인도나 손해볼 것 없는데 뭘 그러느냐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누이 좋고 매부 좋다 해서 편의대로 역사를 다시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문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가야사 복원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이는 바로 100대 국정 과제에도 포함이 됐다. 잘 된 일이다. 그렇더라도 가야와 인도를 무리하게 연결짓는 일에까지 대통령 부부가 나서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정치인이 역사를 불러낼 때는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실증적 연구 없이 의욕과 주장만 앞세우면 그게 바로 역사왜곡이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11-01

[역사의 창] 한국은 속국인가

#. 한국이 많이 의기소침해졌다. "미국의 승인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한 트럼프 대통령의 말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너무 앞서 나가는 것에 대한 불만이자 경고였을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도 너무 나갔다. 한국이 미국의 속국인가. 식민지인가. 실상은 그 비슷하다 해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했다는 것이 한국인들을 실로 무참하게 만들었다. '자주국이고 자주민인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었어.' 여야 정치인을 포함해 많은 한국인들이 사실상 속국 취급 받은 것에 울분을 삼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에도 "역사적으로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발언으로 한국민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뒤 대화 내용을 여과 없이 전한 것이다. 그래도 그때는 넘어갔다. 관점에 따라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근거란 이렇다. #. 역사적으로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중국 중심의 '천하질서와 조공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천하질서란 세계가 중국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중국이 스스로를 '중심 나라'를 의미하는 중국(中國)으로, 사방 이민족은 동이(東夷:한국)-서융(西戎:티베트), 남만(南蠻:베트남)-북적(北狄:위구르) 등 동서남북 오랑캐로 부른 것은 그런 천하질서의 한 단면이었다. 천하질서는 조공과 책봉으로 유지됐다. 조공이란 주변 작은 나라들이 중국 황실에 정기적으로 예물을 바치던 것을 말한다. 조공을 받으면 중국은 그 답례로 받은 것 이상의 하사품을 보냈다. 때문에 때론 조공을 부담스러워하기도 했지만 체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는 경우도 많았다. 조공국 입장에선 사실상의 무역이었다. 책봉은 주변국에 새 임금이 즉위하면 중국 황실이 승인해 주는 것이었다. 어떤 나라는 뒤탈을 염려해 전략상 자청해서 군신관계를 맺고 책봉을 청하기도 했다. 조공과 책봉이 이뤄졌다 해서 실상까지 주종관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조선도 중국에 대해 조공과 책봉에 기댄 사대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그것은 암묵적으로 독립과 자주권을 인정받았다는 전제 하에 이뤄진 것이지 일방적인 예속관계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평화관계를 지속하면서 실리를 챙기겠다는 외교의 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외부의 간섭을 받아서는 안된다.' 1918년 1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천명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다. 여기에 고무되어 수많은 식민지 민족들이 독립의 불씨를 지폈다. 우리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마하트마 간디가 이끄는 인도의 저항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역사에서 미국의 위대한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바탕은 '아메리카 퍼스트'다.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로 다시 군림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 중국처럼 천하질서나 조공-책봉의 파워를 미국도 똑같이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금의 세계질서는 한 두 강대국의 완력과 독주 대신 공존 공영, 평화 평등의 원칙 하에 재편되고 있다. 당연히 한 나라의 국익과 국격도 거친 말과 좌충우돌 힘 과시로 얻어지지 않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아무리 작은 주도 주권의 무게는 같다고 생각했다. 크든 작든 모든 주에 똑같은 수의 상원의원을 둔 이유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아무리 작은 나라라도 주권의 무게는 같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것을 알았어야 했다. 트럼프의 막말과 외교 결례는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엔 너무 했다. 아무리 그래도 미국을 가장 가까운 우방으로 생각하는 한국을 두고 속국이나 식민지에게나 쓸 수 있는 '허락, 승인' 이라니. 한인으로서 심히 자존심 상하고, 미국 이민자로서 미안하고 부끄럽다. 한국은 정말 분발해야 한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10-11

[역사의 창] 대통령의 지지율

#. 문재인 대통령과 여러모로 비견되는 미국 대통령이 있다. 1828년 취임한 앤드루 잭슨(1767~1845) 대통령이다. 대권 재수도 그렇고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업고 대통령이 된 것도 닯았다. 초반기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강력한 개혁 정책을 밀어붙인 것도 비슷하다. 1776년 독립선언 이후 북동부 정치 명문가 출신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은 잭슨이 처음이었다. 그 이전 워싱턴-애덤스-제퍼슨-매디슨-먼로 대통령 등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은 모두 버지니아나 뉴잉글랜드 출신 엘리트였다. 6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도 2대 존 애덤스 대통령의 아들이었다. 잭슨은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변호사로, 군인으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1812년 발발된 영국과의 전쟁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워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1818년엔 휘하의 군대를 이끌고 당시 스페인령이던 플로리다로 쳐들어가 세미놀 인디언 부족을 제압하고 스페인으로부터 플로리다를 양도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이런 잭슨에게 대중은 열광했다. 그 인기를 업고 1824년 대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기성 정치의 벽은 높았다. 1차 투표에서 이기고도 정적들의 '야합과 농간' 때문에 결선투표에서 지고 말았다. 결국 4년을 더 기다렸고 마침내 압도적 표차로 7번째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 잭슨은 대통령이 되자 포퓰리즘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당장 동부 유력 가문의 전유물이었던 워싱턴 정가에 서부 출신 혹은 중하류층 인재가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자신의 지지자들을 노골적으로 등용한 것이다. 집권 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 격인 엽관제(獵官制)의 시작이었다. 연방 탈퇴를 위협하는 주에 대해선 군대까지 동원하는 강경책으로 연방 분열을 막았다. 의회와도 사사건건 부딪쳤지만 그럴 때마다 전임 대통령들이 거의 행사하지 않던 거부권으로 맞섰다. 이런 이유들로 잭슨은 '대중 독재자' 혹은 '앤드루 국왕'이라고까지 불렸다. 그는 허물이 많았다. 의회와의 잦은 충돌, 타협을 모르는 일방적 독주, 그리고 측근 중심의 코드 인사 등이 그것이다. 특히 무자비한 아메리칸인디언 소탕 정책은 지금까지 비난을 받는다. 그 때문에 20달러 지폐에 들어가 있는 잭슨의 얼굴이 빠질 뻔하기도 했다. 잭슨 대신 흑인 노예 출신 여성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을 넣자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논의는 흐지부지 되었다(공교롭게도 트럼프 대통령 역시 주류 기성 정치권과는 거리가 먼 이단아라는 점에서 잭슨과 닮았다). #. 프랑스 역사가 토크빌은 1830년대 잭슨 시대를 분석해 '미국 민주주의'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다. 이 책에서 토크빌은 절제 없는 민주주의는 대중독재나 중우정치로 귀결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또한 당리당략과 무지한 자들의 편견 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의 판단이 흐려질 수도 있음도 일깨웠다. 그의 통찰은 지금도 유용한 반면교사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 시민의 압도적 지지 속에 출범했다. 그런데 지금 민생경제에 발목이 잡혔다. 지지율도 반토막 났다. 그렇다고 조급한 무리수는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반대 목소리는 있게 마련이다. 최저임금 올리니 자영업자 다 망한다고 난리가 났다. 그래서 임대차보호법 개정하자 하니 이번엔 건물주 다 망한다고 반대한다. 아파트값 오르면 부동산 정책 실패라며 비난한다. 그래서 집값 잡겠다고 세금 찔끔 올리면 집주인 망한다고 또 욕한다. 그래서 정치가 어렵다. 지지율 떨어졌다고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지 말란 법은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반대파의 공격과 비난에 시달렸던 앤드루 잭슨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강력한 미국, 서민을 위한 정치라는 큰 목표를 보고 나아갔다. 그런 잭슨을 지금 미국인들은 나라 시스템을 정비하고 본격적인 서민 민주주의 시대를 연 대통령으로 더 많이 기억한다. 문재인 정부도 못할 이유가 없다. 아직 3년이나 남았다. 좀 더 멀리, 길게 보았으면 한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09-13

[역사의 창] 미중 무역전쟁과 중국의 실체

#. 한국에게 중국은 어떤 나라일까. 당장 '대국(大國)'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크다. 전통적으로 흠모하는 분위기도 남아있다. 역사가 원인이다. 공자 맹자 문화적 영향이 컸다. 수나라, 당나라, 요나라, 원나라, 청나라. 침략도 받고 간섭도 받았다. 사실상 속국 신세가 되기도 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 10년 반짝 중국 깔보는 분위기가 있긴 했다. 중국의 경제 규모가 지금처럼 커지기 전이었다. 하지만 다시 눈치보기로 돌아섰다. 중국 관광객이 몰려오고, 한국 기업이 몰려가면서다. 외교적으로도 중국은 미국 이상의 관심국이 되었다. 한국 정치인들이 툭하면 베이징을 찾아가고 대통령도 자주 방문한다. 한국 언론도 중국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시콜콜 보도한다. 정말 중국이 그렇게나 대단한 나라일까. 냉전 이후 오랫동안 미국의 맞상대는 구소련이었다. 지금은 형식적이나마 G2라 해서 중국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실제로 중국의 경제력, 군사력은 일취월장이다. 외교 무대에서의 공세나 영향력도 대단하다. 하지만 미국을 따라가려면 아직은 멀었다는 의견도 많다. 지금 펼쳐지고 있는 미중 무역전쟁을 봐도 그렇다. 지난달 트럼프 대통령은 34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25% 추가 관세 부과 조치를 취했다. 사실상 무역 선전포고였다. 시진핑 주석도 동일한 조치로 맞받았다. 미국은 한 발 더 나갔다. 20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에 대해 10% 추가 관세를 매겼다. 호기롭던 중국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생산과 소비, 투자가 위축되면서 중국 경제에 빨간불이 켜졌다. 상하이 증시는 연초 대비 25%나 급락했다. 이대로라면 중국이 조만간 백기를 들고 말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 17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당시 중국, 청나라도 외형적으로는 세계 최강이었다. 유럽 열강들은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에 기가 눌렸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중국의 실체가 드러났다. 당시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차(茶)를 수입해 갔다. 대금으로 막대한 양의 은(銀)을 지불했다. 영국은 다시 그 은을 회수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공급했다. 중국인들이 병들어 가자 청나라 조정이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이 선전포고를 했다. 1840년 1차 아편전쟁 발발이다. 영국은 무력시위 정도로 넘어가려 했다. 협상에서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 서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실은 거대한 중국을 건드리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은 딴판이었다. 청나라 군대는 무기력했다. 수도 베이징으로 가는 길목인 텐진이 싱겁게 함락됐다. 결국 청나라가 항복했다. 홍콩도 이때부터 1997년 중국에 반환될 때까지 156년간 영국 땅이 됐다. 1856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다시 청나라를 공격했다. 2차 아편전쟁이다. 청나라는 또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고 아편무역도 합법화되었다. 이후 서양 열강은 앞다퉈 중국 각 지역을 조차(租借)했다. 각종 이권과 사업권도 뺏어갔다. 결국 중국은 반식민지, 종이 호랑이 신세로 전락했다. #. 지금 중국은 그때의 중국이 아니다. 그럼에도 정치적, 사회적 취약점이 너무 많다. 특유의 허세도 여전하다. 내가 약하면 지레 그 허세에 눌린다. 국토 면적과 인구가 국력인 시대는 지났다. 5000만 명 넘는 인구를 가진 나라 중 3만 달러 이상 소득을 이룬 나라는 미-일-독-영에 프랑스, 이탈리아 6개국 밖에 없다. 한국이 올해 7번째로 그 그룹에 들어갈 것이라 한다. 이제 한국도 강국이다. 중국을 '대국'이라며 너무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외교든 무역이든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면 된다. 옛 고구려는 당당했다. 수나라, 당나라 100만 대군도 물리쳤다. 실리와 자존심의 적절한 균형, 그것이 대한민국 대중국 외교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08-30

[역사의 창] 한의사들 분발하라

#.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동의보감은 '조선 3대 의서'로 불린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은 이름 그대로 우리 땅 한반도에 자생하는 향토 약재와 그것을 이용한 치료법을 집대성한 책이다. 세종 때인 1433년 출간됐다. 의방유취(醫方類聚)도 세종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인 1477년에 세상에 나왔다. 중국 의서 200여종을 참고하고 고려~조선 초까지 우리 고유의 의학 성과를 모은, 현존 최대의 처방 서적으로 평가받는다. 허준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세계적인 임상 백과사전이다. 임진왜란 직후인 광해군 때(1613년) 간행됐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런 책들은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그 동안은 접근이 어려웠다. 하지만 최근 속속 한글로 번역되고 있다는 소식이 잇따르고 있어 반갑다. 지난 7월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의방유취 번역에 착수해 첫 책으로 총론편을 출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나머지도 순차적으로 계속 출간될 것이라 한다. 그 전인 5월에는 한국한의학연구원이 7년 간의 작업 끝에 향약집성방 85권 전부를 번역, 원문과 함께 온라인에 공개했다. 한의학고전DB(https://mediclassics.kr/)에 접속하면 동의보감 등 다른 전통 의학서 70여 종과 함께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 조선 선비들은 교양과 실용 차원에서 의서도 즐겨 읽었다. 선비라면 모름지기 백성들을 잘 살펴 이롭게 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었고 그러자면 당연히 몸과 병도 웬만큼 다스릴 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영향인지 몰라도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마다 한의사 이상으로 맥 잘 짚고 침 잘 놓는 분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서양 의술이 보편화되면서 그런 전통은 단절되었다. 특히 1951년 국민의료법 제정 이후 한의사 자격요건이 강화됨으로써 한방의료도 고도의 전문영역이 되었다. 2000년부터는 한의대 졸업 후 4년의 임상 수련을 더 요하는 8개 과목 한방전문의 제도까지 도입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의학을 '비과학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앞서 언급한 의서들만 해도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고 꼼꼼하며 경험적, 실증적 연구에 기반한 '과학적' 성과들이지만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우리가 그동안 너무 서양 의학의 관점으로만 전통 의학을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모른다고 비상식은 아니다. 내가 이해 못한다고 비과학인 것은 더욱 아니다. 지금처럼 서양 의학이 보편화되기 전에는 전통의학이 수많은 사람을 살려왔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한의학에 대해 그렇게 쉽게 폄훼하거나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 한의학계도 반성하고 분발할 필요는 있다. 과거엔 원전 몇 권 안 읽고도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전통 의서 수십 권은 쉬운 한글로도 얼마든지 찾아 읽을 수 있고 한의사 이상의 지식을 가질 수가 있다. 전통의학이라 해서 언제까지 옛날 방식만 붙들고 있어서도 미래가 없다. 서양 의학처럼 새로운 약재, 새로운 치료법을 끊임없이 연구 개발해 내놓을 때 한의도 '사람 살리는 의학'으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이나 서구 의학계에서 오히려 동양 전통의학 연구가 날로 활발해지고 있음을 우리 한의학계는 긴장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2015년 중국 전통의학연구원의 당시 85세 투유유 교수는 중국 전통 약초 서적을 연구해 '개똥쑥'으로 불리는 풀에서 말라리아 치료제 성분을 찾아내 노벨의학상까지 받았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한의학은 수천년 경험과 지혜로 축적된 민족 자산이다. 그 소중한 콘텐트들이 잇따라 한글로 번역됨으로써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그것을 활용해 세계가 인정하는 새로운 '의학'으로 도약, 발전시키는 것은 결국 한의사(韓醫師)들의 몫이다. 이곳 미주에도 수많은 한의원이 있고 한의사들이 있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08-02

[역사의 창] '예맨 난민' 시험지 받아든 한국

현대 국가는 대부분 다민족 국가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캐나다, 중국, 인도 등 큰 나라들이 모두 그렇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선진국들도 다양한 출신의 이민자나 난민을 받아들인다. 문제도 있지만 사회적 활력의 원천이라는 긍정적 요소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 이스라엘 같은 단일 민족국가는 예외적이다. 유달리 혈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우리도 역사를 조금만 더듬어보면 민족 순혈주의가 얼마나 자가당착인지 알 수 있다.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지금 같은 민족 개념은 없었다. 신라는 당나라와 더 가까웠고 백제는 왜(倭)와 더 친밀했다. 고려 때도 다양한 이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발해 유민 포용이다.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등을 규합해 세운 나라다. 한 때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통일신라와 함께 10세기 중반까지 우리 역사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조선 초기 편찬된 '고려사'에는 926년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한 후 얼추 12만 명의 유민이 고려로 넘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전기 인구 200만 명의 6%에 해당하는 많은 숫자다. 발해 주민은 지배층 10~20%만 고구려 계통이고 나머지 80%는 말갈족이었다. 말갈족은 훗날 여진족,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는 북방민족이다. 이들이 대거 고려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고려가 몽골의 간섭을 받은 기간은 100년 가까이 된다. 그 동안에도 이리 저리 피가 섞였다. 조선시대에도 난리 통에 귀순해 온 여진족이나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더 하다. 한국이 잘 살게 되면서 2017년 현재 한국에 둥지를 튼 외국인은 200만 명이 넘는다. 전체 남한 인구의 4%다. 그들은 결혼이나 취업 등 여러 경로로 한국 사람이 되었거나 되고 있다. 그 자녀들은 한국군에까지 입대한다. 언제까지 한국이 단일 민족만 내세울 처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 역사적으로 크게 융성했던 나라들은 거의가 이민족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다는 점이다. 로마, 페르시아, 몽골제국이 다 그랬다. 중국 역사상 가장 번성했던 당나라도 다른 어떤 시대보다 개방적이고 인종적, 종교적으로 관대했다. 반대로 아무리 강성했던 제국도 자민족 중심주의에 빠지게 되면 예외 없이 쇠락의 길을 걸었다. 중동의 오스만투르크, 중국 명나라, 인도의 무굴제국 등이 그 예다. 에이미 추아 예일대 법대교수는 '제국의 미래(원제:Day of Empire)'라는 책에서 로마제국의 융성은 "여왕이 아니라 어머니의 마음으로 피정복민을 받아 안은 데서 나왔다"고 했다. 미국도 그랬다. 서부 개척부터 산업의 급성장, 2차 세계대전 승리, 초일류국가 위상 확립으로 이어지는 번영의 원동력은 이민자들의 우수한 노동력과 재능이었다. 하지만 9·11 이후 이민자 문제, 환경 문제 등에서 다른 국가와 담을 쌓고 강력한 불관용 정책을 펼치면서 미국도 몰락한 과거 제국들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는 게 추아 교수의 진단이다.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역시 결과적으로 미국의 쇠락을 재촉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세계는 지금 거대한 역사의 전환기다. 이념과 사상의 대립 갈등을 넘어 다양한 인종과 종교, 문화, 사상의 공존이 21세기 시대정신이 되었다. 거기에 더 이상 자민족 중심주의는 설 자리가 없다. 순혈 민족주의에의 집착이 얼마나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의 적이 되고 있는지는 히틀러 독일이나 지금의 이스라엘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되었다. 미국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계속 남을 수 있을 지의 여부는 강력한 군사력, 경제력이 아니라 자유, 민주, 평화, 인권, 관용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의 실현에 얼마나 앞장서는가가 결정할 것이다. 그런 점에선 작은 나라 한국도 희망이 있다. 분단과 냉전의 상처로 깊이 아파 본 만큼 인류 보편가치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도에 온 예멘인 549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고 한다. 그들을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한국이 들끓고 있다. 한국 정부가, 아니 한국 사람들이 어떤 답안을 써 낼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한국은 지금 남북회담에 이어 또 하나의 중요한 시험지를 받아 들었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06-21

[역사의 창] 난(亂)인가 혁명인가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의 명칭 또한 이긴 자, 힘 가진 자의 논리에 따라 붙여진다. 하지만 역사의식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과거의 명칭이 새롭게 바뀌기도 한다. 우리 역사에도 그런 것들이 꽤 있다. 1894년 발발한 동학농민혁명은 오랫동안 '동학란'으로 불렸다. 동학교도가 세상을 어지럽힌 반란이라는 뜻이다. 당시 조정을 이끌었던 민씨 일파와 개화파 정권, 동학군 진압에 나섰던 일본군, 심지어 지식인이라던 유림들조차 그렇게 인식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연구가 쌓이면서 동학농민봉기, 동학농민전쟁, 농민운동운동 등 다른 이름도 쓰이기 시작했다. 북한에선 계급투쟁적 측면을 강조해 '갑오농민전쟁'이라고 부른다. 눈에 띄는 것은 1961년 5·16 이후의 명칭 변화다. 동학의 사회 변혁 의지에 주목한 집권 군부는 "우리나라의 혁명은 5·16과 동학뿐"이라며 '난(亂)'을 '혁명'으로 격상시켰다. 1963년에 전북 정읍 덕천에 세워진 갑오동학혁명기념탑, 1973년 공주 우금치에 건립된 동학혁명군위령탑은 그런 인식 변화의 산물이었다. 2004년 국회에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은 국가 공인 명칭이 됐다. 그렇지만 주체 세력, 전개 과정, 이념적 지향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여전히 다양한 조합의 이름으로 불린다. 120년도 넘은 과거사지만 그 평가는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말이다. #. 오늘 38주년을 맞는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처지가 비슷하다. 동학란이 그랬던 것처럼 '1980년 광주' 역시 처음에는 소요사태, 폭동 등으로 불렸다. 당시 집권 신군부와 그 통제를 받던 대부분의 언론 보도가 그랬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가 큰 진전을 이루면서부터 명칭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의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운 점을 부각해 민주항쟁으로 부르는 이가 많아졌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은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과 보상을 언급한 공식 담화문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했다. 같은 해 국회에서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을 내 건 진상조사 특위가 설치됐다. 2011년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5·18을 지칭하는 국내외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럼에도 해마다 5월이면 논란은 재연되고 있다. 관련자들은 재판을 받았고 국가 차원의 희생자 보상도 이루어졌지만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어서이다. 게다가 군부 당사자들조차 부인한 북한 개입이라는 '가짜 뉴스'를 철석같이 신봉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겐 우리 정부 발표도, 어떤 확실한 증언이나 진상 규명도 소용이 없다. 그저 처음 각인된 대로 5·18 광주는 영원한 '폭동'이요 '반란'일 뿐이다. #. 지난 사건을 바르게 기억하고 그 이름을 바르게 불러주는 것은 후손된 자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이는 앞선 시대를 살았던 사람, 특히 사건에 참여하고 연루된 사람들의 삶을 바르게 평가하는 일과도 직결된다. 과거 일본이 얼마나 많은 잘못된 용어로 우리 역사를 왜곡했는지만 생각해 봐도 역사 용어 바로 쓰기가 왜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과거 사건의 호칭 또한 바뀔 수 있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는 분명히 있다. 지금 대한민국이 이만큼이나마 자유와 민주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날 누군가의 숭고한 희생의 바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이것을 생각한다면 어떤 역사라도 함부로 조롱하거나 폄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학도, 광주도 마찬가지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05-17

[역사의 창] 인질과 볼모의 국제 정치

#. 북한에 억류돼 있던 한국계 미국인 세 명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북한은 이들을 모두 간첩이나 적대행위 혐의로 체포했었지만 사실상 인질이었다. 누군가를 인질로 삼는다는 것은 대항 능력이 없는 민간인을 강제로 억류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겁하고 졸렬하다. 그럼에도 테러단체나 소말리아 해적 같은 불법 집단, 심지어 도둑이나 강도같은 잡범들까지 곧잘 인질극을 벌인다. 석방 협상을 통해 나름대로 효과나 재미를 보기 때문이다. 북한이 툭하면 미국인을 억류했던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역사를 읽다 보면 인질과 비슷하면서도 성격이 다른 '볼모'가 자주 등장한다. 인질이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싸울 때 쉽게 유혹받는 방법이라면 볼모는 강자의 요구에 따라 약자가 어쩔 수 없이 응해야 한다는 차이가 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항복을 받은 청나라가 인조의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려간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멀리 원나라에 가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고려 왕자들도 볼모로 고통을 받았다. 나중엔 돌아와 왕위를 이었지만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왕 등과 같이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의 충성 충(忠)자가 들어간 시호까지 받아 써야 했다. 강대국에 억눌린 약소국의 설움이었다. '볼모 왕자'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신라 초기 내물왕의 두 아들이자 눌지왕의 동생인 미사흔과 복호는 오랜 세월 왜(일본)와 고구려에 볼모로 붙잡혀 있었다. 그때 박제상이란 사람이 고구려로 넘어가 장수왕을 설복해 복호를 구해왔다. 이어 왜국으로 건너가 미사흔도 탈출시키지만 끝내 자신은 붙잡혀 처형당한다. 이때의 장면은 삼국유사에도 생생히 전한다. 왜왕이 박제상에게 신하가 될 것을 요구하자 "내 비록 계림(신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답하며 장렬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신라 최고의 충신이자 애달픈 '망부석' 전설의 주인공 박제상은 그렇게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 인질이든 볼모든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이라는 점에선 똑같이 비열한 죄악이다. 대부분 국가들이 '인질의 목숨을 담보로 한 거래엔 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포로 석방이나 몸값 지불, 정책 변경 같이 테러 집단이 요구하는 조건은 절대 들어주지 않는다. 물론 미국인이 억류당했을 때마다 고위급 인사 파견 등 다각도의 물밑 협상으로 인질을 구해온 경우가 있긴 했다. 그래도 북한에 대해서는 줄곧 악의 축 내지 테러집단으로 규정해 왔던 만큼 표면적으로는 이 원칙을 포기하진 않았다. 이번엔 달랐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두 번이나 평양을 방문하면서 억류 미국인 석방 문제를 대놓고 협상 테이블에 올렸다. 테러집단과는 어떤 거래도 않는다는 원칙의 파기라 할 만큼 파격이었다. 북한을 정상 국가로 인정해 비핵화를 끌어내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그만큼 확고하다는 것이 읽히는 대목이다. 북한 역시 이에 화답해 억류자 조기 석방이라는 선물을 안김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주었다. 대미 협상카드로 끝까지 '인질'을 활용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회담 일정이 다음달 12일 싱가포르로 확정됐다. 이미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불량국가 이미지를 털고 현실 세계로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정상 국가로 대접받고 싶은 바람은 북한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이제 더 이상 비인도적인 인질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억류 중인 한국인 6명도 조속히 돌려보내야 한다. 정상 국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핵이나 탄도미사일이 아니라 이런 상식적인 조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05-10

[역사의 창] 왕건의 길, 통일의 길

#. 우리 민족사에서 통일은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신라의 삼국통일(676년)이고 두 번째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936년)이다. 신라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힘을 빌린 무력 정복 통일이었다. 후삼국 통일은 달랐다. 크고 작은 전투는 있었지만 크게 보면 흡수 평화 통일이었다. 후백제의 견훤이 먼저 고려에 투항했고 신라 마지막 경순왕도 스스로 나라를 들어 바쳤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창업 군주 태조 왕건(재위 918~943년)의 리더십도 큰 역할을 했다. 리더 한 사람의 역량이 국가적 역량으로 승화됐을 때 얼마나 큰일을 이뤄낼 수 있는 가를 생생히 보여준 사례다. 40여년 후삼국 분열을 종식시킨 왕건의 리더십, 어떤 것이었을까. 첫째, 가능한 한 무력 사용을 자제했다. 인내와 끈기로 때를 기다렸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고수임을 알았다. 둘째, 포용했다. 적군도 싸우고 나면 죽이지 않았다. 귀순해 오는 호족들은 성(姓)을 하사하며 지위와 부를 그대로 인정했다. 자신에게 수없이 패배의 수모를 안겼던 라이벌 견훤 조차 투항해 왔을 때 아버지의 예로 맞아들였다. 신라 경순왕에게는 사심관 벼슬을 내려 경주를 계속 다스리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장녀 낙랑공주까지 주어 혼인을 시켰다. 확실한 내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하자 그 유민들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들은 고려의 노동력과 군사력에 큰 보탬이 됐다. 셋째, 겸손했다. 지방 호족들이 득세하던 군웅할거 시대, 왕건은 독보적이었지만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다. 자신을 낮추어 마음을 얻었다. 왕건은 29명의 아내를 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호색(好色)이 아니라 정책이었다. 각지의 유력 호족과 혼인으로 연을 맺어 자기 세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넷째, 삼한 땅을 다시 통일하겠다는 비전이 있었다. 상대도 결국 내 백성임을 잊지 않았다. 왕건이 궁예나 견훤과 달리 세금을 줄여주고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고 헤아렸던 이유다. 민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 한반도가 요동치고 있다. 통일의 길이 언뜻언뜻 보이는 듯도 하다. 하지만 곳곳에 늪도 있고 돌부리도 나타날 것이다. 어떻게 가야 할까. 민족사 세 번째 통일로 가는 길, 1100년 전 왕건이 걸었던 길이 길잡이가 될 것이다. 첫째는 평화 정책의 고수다.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있다. 좁은 한반도 땅에서 너도 죽고 나도 죽겠다는 이야기다. 피는 피를 부르고 폭력은 원수를 만든다. 무력과 강압은 일시적 복종을 강제할 수 있지만 끊임없는 이반과 모반의 위협에 또 맞서야 한다. 둘째는 포용이다.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의 40배다. 공산주의는 쇠락하고 자유민주주의의는 세계사의 대세가 됐다. 그것으로 체제 경쟁은 끝났다. 가진 자가 품어야 한다. 힘 있는 자의 아량만이 상대의 마음을 진정으로 얻을 수 있다. 셋째는 겸손이다. 좀 잘 산다고 해서 거들먹거리지는 말아야 한다. 상대를 인정하고 배려해야 한다. 자존심으로 버티는 북한이다. 그것마저 건드리면 대화도 협상도 멀어진다. 다시 원점이다. 넷째는 비전이다. 통일의 비전은 민족이 함께 잘 먹고 잘 살자는 것이다.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어야 통일도 있고 민족도 있다. 화해 분위기에 섣불리 휩쓸려 내치와 경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70년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상대다. 잠깐 얼굴 바꿨다고 속마음까지 달라졌다는 걸 어떻게 믿느냐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믿어 보자.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달라졌다. 옛 원한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어떤 역사 발전도 이뤄낼 수 없다.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자가 이기는 자다. 지금 우리가 그 일을 할 때다. 이종호 논설실장 lee.jongho@koreadaily.com

2018-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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